
트랜스젠더 에디와 엘리스의 내밀한 삶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 '에디 엘리스'는 단지 정체성의 문제를 넘어, 존재를 감각하고 증언하는 영화다. 퀴어영화제 개최가 거부당하는 현실 속에서,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외면하는 현실을 거짓없이 보여준다.

“나를 삼촌이라 부르거나 이모라고 부르지 않아도 된다고. 그냥 에디라고 불러달라고 했어요.”
성전환의 과정을 겪는 에디는, 자신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조카들에게 “그냥 에디라고 불러줘”라고 말한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다만 ‘에디’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길 원하는 그의 요청은 젠더의 이분법을 넘어서며, 사랑하는 조카들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자아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시도로 다가온다.
다큐멘터리 '에디 엘리스'는 트랜스젠더인 에디와 엘리스, 두 인물의 자전적 여정을 솔직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남성의 몸으로 태어나 여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수술과 사회적 이행을 거친 이들의 서사는, 무려 4년에 걸친 제작 기간만큼이나 깊이 있고 섬세하게, 날 것 그대로 전해 진다.
영화는 에디가 9년간의 긴 준비와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을 따라, 전환 수술을 받기 위해 태국으로 향하는 여정을 따라간다. 태국의 병원 대기실, 수술을 앞두고 병상에 누운 에디의 무표정한 눈에서 천천히 눈물이 흐른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느냐”고 묻는 어머니의 무심하면서도 진심 어린 말, 전환 이후에도 그를 여전히 ‘아들’이라 부르는 아버지의 굳은 표정. 조용히, 그러나 깊숙이 가해지는 폭력처럼 다가온다. 이 모든 순간은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을 넘어, 존재 그 자체가 시험받는 고통의 궤적을 그려낸다.
한편, 영화의 조명 스태프이자 동시에 또다른 주인공이기도 한 엘리스의 위치는,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존재이자, 그 ‘만들어짐’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행위하며 지평을 확장해나가는 이중적 위치를 드러낸다. 에디의 이야기를 따라 들어간 카메라는, 때때로 엘리스가 던지는 짓궂은 농담과 함께 촬영 현장의 풍경을 담아내며, 프레임 바깥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로써 관객은 인물의 삶과 제작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점을 오가며, 개인의 서사와 현실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감각 속으로 자연스럽게 이끌린다.
"나는 뭘 좋아하지?"
성정체성 혼란을 마주하며, 그 혼란을 향한 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과도 싸워온 엘리스는, 마침내 자신을 담대하게 인정해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에디 엘리스'라는 영화와 만난 그는, 그제서야 자신의 욕망에 대해 묻는 용기를 내보인다. 타인의 시선과 규범이라는 외피를 벗겨낸 자리에서, 엘리스는 생존을 넘어 존재의 본질을 탐색하는 질문 앞에 선다. 그의 여정은 정체성이 단지 사회적 라벨을 얻는 문제가 아니라, 삶의 의미 자체를 향한 근원적인 물음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 의미는 다시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우리는 이따금 잊고 살아간다.
영화 ‘에디 엘리스’는 바로 그 내밀한 존재의 층위를, 집요할 만큼 깊이 파고든다.
용산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으로 잘 알려진 김일란 감독 특유의 성실하고도 집요하게 파고든 시선은, 인물의 삶을 단순한 ‘서사’로 소비하지 않고, 그 고통의 리듬과 감정의 온도에까지 밀착하여 관객을 인도한다. 다큐멘터리 '공동 정범' 이후 8년만에 선보인 '에디 엘리스'에서는 트랜스젠더 두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 사회의 문화적 억압과 일상의 고통스러운 어울림을 교차시킨다.
한국퀴어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된 본 작품을 관람하게 된 것은,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하인리히 뵐 재단 동아시아사무소가 이 영화제를 후원하게 되면서 주어진 특별한 기회였다. 올해 초부터 상영관을 물색하며 차근차근 준비해온 이번 영화제는, 갑작스러운 대관 취소로 위기를 맞게 되었고, 이에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는 하인리히뵐재단 동아시아 사무소까지 닿게 되었다. ‘인권과 민주주의’, ‘성소수자와 젠더 정의’ 등 ‘평등’과 ‘정의’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씽크-두 탱크(think-do tank)를 자임하는 하인리히뵐재단은, 작년 한국에 동아시아 사무소를 개소한 이후 동아시아 지역의 인권 증진을 위해 시민사회를 후방에서 지원해오고 있다.
올해로 25회를 맞이한 한국퀴어영화제는, 그 지속 자체가 투쟁의 역사임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당초 상영이 예정되어 있던 이화여대 캠퍼스 내 아트하우스 모모가 “기독교 이념에 반하는 영화를 학교에서 상영할 수 없다”는 대학 측의 요구를 들어 일방적으로 대관을 취소한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행정상의 갈등을 넘어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구조적 혐오를 드러낸다.
아이러니하게도, 아트하우스 모모는 퀴어 서사를 담은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 감독의 신작 '퀴어(Queer)'는 상영하면서, 정작 한국퀴어영화제에는 문을 닫았다.
대관을 취소한 측의 이중적 잣대에 대한 비판은 곧바로 이어졌다.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상영된 영화 '퀴어'의 각본가 저스틴 쿠리츠키스(Justin Kuritzkes)는 공식 성명을 통해 “오늘, 이는 분노를 자아내는 위선과 맞물려 있다(today it is tied up in an infuriating hypocrisy.)”는 강도 높은 비판을 남겼다. 쿠리츠키스는 “좋은 영화는 단지 현실을 반영할 뿐이며, 현실은 퀴어한 사람들이 인류 역사 내내 전 세계 어디에나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이 문장은 영화 에디 엘리스가 지닌 존재의 의의를 환기시킨다. [비판 성명 원문 보기]
불행 중 다행으로 노원에 위치한 '더숲아트시네마'에서 이번 영화제 개최에 협조를 해 준덕에 정성들여 준비해 온 영화제를 무사히 개최될 수 있었다.
어두운 상영관 안. 영화 상영 내내 관객석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던 훌쩍이는 울음소리. 그것은 단지 감정이입의 결과라기보다는, 영화 속 인물의 삶이 누군가의 현재와 깊이 겹쳐지는 순간에 발생한 공명처럼 느껴졌다. 유머와 슬픔, 체념과 희망이 절묘하게 뒤섞인 140분의 시간 속에서, 관객은 각자의 방식으로 숨죽인 채 영화를 통과하고 있었고, 나 역시 그 울음의 호흡을 따라 영화의 장면 장면을 마주했다.
트랜스젠더인 에디와 엘리스는 단지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 함께 살아가는 현실의 일부다. 이들을 감각하고 이해하는 사회, 이들이 존재를 숨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은 한, 우리에게는 여전히 영화라는 매개가 절실하다. 영화는 가시화되지 못한 존재를 드러내는 안전한 창이며, 아직은 부족한 현실 속에서 퀴어한 이들이 자기 자신으로 설 수 있게 돕는 가장 강력한 공공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저는 미약한 한 개인이겠으나 힘을 보태어 이 변화에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말을 남긴 트랜스젠더 군인 변희수 하사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4년 반이 흘렀다. 성별 고정관념이 뿌리 깊은 군대 안에서 그는 용기 있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고, 수많은 성소수자들은 숨죽여 그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는 동시에 두려움의 마음으로 그의 발걸음을 응원했다. 그러나 사회는 끝내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군인이라는 직업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변 하사가 맞이했어야 할 삶의 다음 장을, 그는 펼쳐내지 못했다.영화의 곳곳에는 잘려나간 필름을 이어붙이는 장면들이 인서트되어 있다. 마치 그 장면들이, 삶의 단절과 고통을 넘어 새로운 장을 써 내려가는 에디와 엘리스의 여정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 영화를 통해 현실 속 더 많은 에디와 엘리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써내려갈 수 있도록 용기를 건넬 뿐 아니라, 그 곁을 지키고 함께 바라보는 이들이 더 많이 연결되기를 바란다. 나아가 이 작품이, 사회적 보호막이 되어주는 서로의 존재가 용기를 잇는 자리가 되기를, 그렇게 우리가 서로를 지탱할 수 있는 연대의 감각으로 확장되기를 바란다.
다큐멘터리 영화 '에디엘리스' 소개 바로가기 (연분홍치마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