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재인 정부 당시 4대강조사평가기획위원회에서 복원 결정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했다. 검찰 수사는 증거불충분으로 종결됐지만, 형사사법포털에 사건 번호를 넣어 확인하고 났을 때는 새삼 헛웃음이 나왔다. 전문가와 활동가들이 숙고 끝에 내린 복원 결정을 ‘업무방해’로 몰아간 것 자체가 무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든 압수수색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비상식적 상황에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고발은 4대강사업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보면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벌써 15년 전, 이명박 정부는 사업을 핵심 국정과제로 추진하며 국가정보원과 경찰까지 동원해 비판적인 시민사회와 언론을 압박했었다. 그는 왜 그렇게까지 강을 개발하려 했을까. 강의 복원을 꿈꾸려면 이 질문을 더 깊이 마주해야 한다.
| 4대강사업: 이명박 전 대통령의 핵심 공약으로 2009년부터 2011년까지 한국의 주요 4대강인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본류에 16개의 댐을 짓고 강 바닥의 모래 5억 7천만톤을 준설함. 이후 녹조 발생 등으로 10년 넘게 한국 사회의 가장 뜨거운 환경 현안이 되었음. |
강, 개발의 꿈
1960년대 후반, 서울의 인구는 급격히 늘었지만 하수처리 시설은 부족해 한강은 오염되어갔다. 그로부터 20여년 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한강종합개발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공사가 진행됐다. 외국인 방문객에게 ‘깨끗한’ 한강을 보여주기 위해 강을 막아 유람선을 띄우고, 교량·공원·아파트·도로를 건설하며, 하수처리장까지 세우는 종합개발이 이루어졌다. 이 사업은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던 이명박이 제안한 것이었다. 그는 평사원으로 입사해 사장까지 오른 뒤, 한강 개발에 열정을 쏟았다.
이후 그는 서울시장으로서 청계천 복원을 밀어붙였다. 환경·역사·교통 논란에도 불구하고 공사는 빠르게 완공됐고, 깔끔히 정비된 도심 공간은 순식간에 시민들의 인식을 바꿨다. 전국에서 “우리 동네에도 청계천 같은 곳이 있었으면” 하는 열망이 퍼졌고, 수많은 ‘유사 청계천’이 만들어졌다. 이는 결국 그를 대통령 자리까지 끌어올렸다.
이명박 대통령의 커리어는 그 자체로 대한민국 토건산업 역사의 신화와 과오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하천으로 흘러드는 하수를 처리하기도 힘들었던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이 강변 공원을 가꾸고, 유람선을 타고, 더 멋진 조경시설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부자나라가 되었다는 만족감이었을지도 모른다.
4대강사업, 토목 사업의 정점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은 도로, 댐, 교량, 항만, 철도, 상하수도 등 사회 기반 시설을 빠르게 확충했다. 토목사업은 단기간에 경기 부양 효과를 보여주며 큰 힘을 발휘했다. 돈을 투자하면 시장이 돈이 풀리고 경제에 활력이 도는 효과를 즉각적으로 보여줬다. 하지만 그런 추세는 영원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큰 힘을 발휘했던 토목사업은 1990년대 후반부터 성장세가 꺾이고, 2000년대 후반에 정점을 찍었다.
토목사업이 주춤거리던 이 시기에 무리하게 추진된 대표적인 사례가 동강댐이었다. 이전의 댐이 주로 기반 시설 확보 목적이었다면, 동강댐은 목적이 모호한 데다 환경파괴 우려가 컸다. 댐을 건설하기에 적절한 대상지 발굴이 어려워지면서 무리하게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2000년, 동강댐은 국민 반대로 백지화됐다. 이후 2006년 수자원장기종합계획에서 신규 댐 계획이 사라지고, 노후 소형 댐 철거가 시범적으로 시작되면서 변화가 모색됐다. 그러나 토목산업의 관성은 여전히 강력했다. 댐 건설을 주장하던 이들은 다시 16개의 댐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고, 이명박 대통령이 깃발을 들었다.
전방위적인 4대강사업 공사가 전국에서 강을 파헤쳤다. 이명박 대통령은 전국에 한강 수변공원같은 시설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주요 하천에 배를 띄우고 수변 도시를 조성하겠다고도 했다. 그가 청장년기를 바쳐 열정을 불태웠던 한강종합개발사업을 전국단위로 확대한 것이다. 경력자답게, 그는 사업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4대강사업으로 홍수를 막고 수질을 개선한다고 홍보했지만, 공사가 끝나자 본류와 중·하류에 만들어진 보는 홍수위를 높였고, 수질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하천수를 음용하는 나라에서 정수가 불가능한 수준의 녹조가 발생하기도 했다. 국민들은 4대강사업에 분노했다.
토목 경제 세력, 저물다
무리였던 4대강사업이 그럼에도 전광석화처럼 추진된 이유는 당시 정치·행정·학계·언론·기업의 핵심 권력층 다수가 이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1980~2000년대를 거치며 토목사업이 곧 국가 발전을 의미했던 경험이 이 세대의 사고를 지배했다.
그러나 완공 후 15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토목사업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4대강사업을 주도했던 정치 세력은 이미 70~80대가 되었고, 새로운 대규모 토목사업을 주도할 동력도 줄어들었다. 이명박 정부의 계승자임을 자임했던 윤석열 정부가 ‘기후대응댐’이라는 이름으로 14개 신규 댐을 추진하려 했지만, 사업 면면을 보면 기존 토목 산업을 떠받칠 만큼의 대규모 사업을 발굴하기는 어려웠다. 정부가 개최한 기후대응댐 자문회의 당시, 4대강사업 완공 이후 10년 넘게 댐 기획을 해본 토목공학 전문가가 없어서 이미 대학에서 퇴직한 교수들만 모였다는 풍문이 들렸을 정도다. 그렇게, 한 시대가 조금씩 저물고 있었다.
댐, 늙어가다
댐 건설을 주도한 세력이 나이를 먹어가는 동시에, 댐 역시 노후화를 피할 수 없다. 한국에서 대형댐 건설의 전성기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였다.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지어진 농업용보는 건설 시기가 명확히 기록돼 있지 않지만,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수가 이미 기능과 용도를 상실했다. 국가물관리기본계획에 따르면 전국에 농업용보는 3만 3,942개이며, 이 중 5,857개는 파손, 3,826개는 폐기된 상태다.
시간이 흐를수록 노후 시설은 늘어나고, 도시화와 지역 소멸이 가속화되면서 용도를 상실한 시설도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류 곳곳에 숨어있는 농업용보에 대한 철거 시범사업이 추진된 적이 있지만, 확산되지 못했다. 강 복원을 고민해온 전문가와 시민사회조차도 4대강사업이라는 본류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특히, 주요 하천에서 녹조 피해가 심각해지면서 환경진영 전체가 4대강 복원에 절실하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요인도 있었다. 사실상 양당 체제인 한국 사회에서 보수 정당인 당시 새누리당 출신의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사업을 추진했고, 민주당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지만, 정쟁 수준에 머물렀을 뿐 대안적 비전은 부재했다. 새로운 세대가 풀씨부터 키워내야만 새로운 비전이 꽃필 수 있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졌다.
마을하천에서 시작하는 작은 풀씨
2016년, 2006년 환경부가 펴냈던 농업용보 철거 시범사업 보고서를 10년 만에 다시 꺼내 읽었다. 연구책임을 맡았던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곡릉2보 철거이후 수질이 가장 뚜렷하게 개선돼 생화학적 산소요구량(BOD, Biochemical Oxygen Demand)이 3~4등급 수준에서 1등급으로 회복된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전국의 활동가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4대강사업의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서 작은 성과부터 만들어갈 동료를 찾고 싶다고 말이다. 그리고 경기도 성남에서 답장이 왔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탄천에서 이제는 쓰이지 않는 농업용보를 철거해보고 싶다고 했다. 이후 5년간 시·환경부·의회를 설득해 3개의 농업용보를 철거했다. 시민과학과 전문가 협업으로 데이터를 수집·분석했고, 홍수 위험도 면밀히 검토했다. 그 결과 홍수위는 1m 낮아지고, 멸종위기종 흰목물떼새가 돌아왔으며, 수질은 처음으로 1등급을 기록하는 등 변화는 극적이었다.
중요한 것은 철거 과정마다 지역 특성을 면밀히 분석하고 이해관계자와 적극적으로 소통한 점이었다. 이렇게 작은 성과를 만드는 데에도 무엇 하나 쉽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더 많은 도전과 성공과 실패가 필요하다. 용도를 상실한 채 강을 가로막고 있는 저 많은 장벽을 하나씩 철거하고 기록을 남겨야 한다.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성과를 고루 나누고, 이 과정에서 신뢰라는 사회적 역량을 쌓아봐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강을 복원하려면 마을의 일부로서 강을 이해하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이 과정을 더 깊이 마주해야 한다. 작은 댐부터 시작하는 이 마음이 거대한 변화의 시작이 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