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여로(旅路) : 오키나와인들의 브라질 이민사

1429년 통일왕국이 성립된 이후 오키나와는 약 450년 동안 독자적인 국가와 전통, 문화를 지닌 류큐국(琉球國)으로 존속했다. 그러나 1879년 일본제국에 의해 주권을 상실한 이후에는 현재와 같은 오키나와현이 되었다. 1941 12월 일본과 미국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고 1945년 일본이 패전하게 되자, 오키나와현은 이제는 미국의 점령·통치 체제에 들어가게 되고, 1972년이 되어서야 행정권이 다시 일본으로 반환되게 된다

  이런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오키나와 사람들은 국적상으로는 일본인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오키나와인(혹은 류큐민족)으로서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이 강하다. 류큐국이 일본으로 병합된 이후 일본식의 호주(戶主)제도와 토지사유제도가 도입되었다. 류큐국 시절의 오키나와는 지배계층인 왕족과 사족(士族)들을 제외한 대다수 민중들의 경우는 호적이나 문중(門中) 개념이 없었고, 가족생활의 중심으로 모가장제(母家長制)적 문화가 강했으며, 토지공유제에 입각한 마을공동체 농업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토지의 사유나 화폐-상품경제가 민중들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토지사유제와 일본식의 장자(長子) 상속을 기본으로 하는 호주제가 도입되자 사족들을 제외한 토지가 없는 많은 수의 민중들이 생존권을 상실하게 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일본정부는 오키나와에 아열대 기후에 적합한 사탕수수 농업을 국책으로 강제했다. 당시로서는 설탕이 고가에 거래되는 환금성 작물로 기대를 모았지만, 192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경제대공황과 설탕 가격의 폭락이 계속되자 오키나와의 경제와 민생은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급기야 식량을 확보할 수 없는 민중들이 독성이 있는 소철(蘇鐵) 나무를 식용으로 활용하다가 사망하는 일도 빈번하게 나타났다. 그래서 이 시기의 극한적인 궁핍 상황을 일컬어 오키나와에서는 소철지옥이라 부른다

  오키나와의 경제가 이처럼 항시적인 빈사상태로 함몰되고 있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일본 본토로의 노동이주나 해외로의 노동이민을 선택하는 것이 민중들 입장에서는 중요한 선택지가 되었다. ‘이민의 섬으로서의 오키나와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1

  이제부터는 브라질 이민사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1908 6 18일 일본의 고베항을 출발한 카사투 마루호가 51일만에 브라질 상파울루주의 상투스항에 781명의 일본인을 내려놓았다. 많은 수의 오키나와현과 인접한 가고시마현 사람들이 배에 타고 있었다. 이때부터 1941년까지 총 188,209명이 일본에서 브라질로 이주했다.2 1941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발발 직후 브라질 정부는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한다. 이에 따라 브라질로의 이민이 중단되었다가 전후(戰後) 1949년부터 재개된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말기인 1944년 이후 오키나와에서는 미군과 일본군의 대규모 지상전이 있었다. 이 와중에 오키나와는 심각한 참화를 겪는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패전 이후에는 미군의 점령하에 급격하게 기지의 섬으로 변모하는데, 가옥은 파괴되고 토지는 미군에 몰수당한 오키나와 민중들은 다시 해외이민을 통해 생존을 모색한다.

  1948년에서 1990년까지 브라질로 이민을 결행한 오키나와인의 수는 모두 9,494명이다. 같은 시기에 아르헨티나로는 3,894, 볼리비아로는 3,448, 페루로는 733명이 이민을 실행하는 등 오키나와현에서 주로 남미 등 해외로 이주한 인원은 모두 17,726명으로 확인된다.3 특히 이민자들이 1950-1960년대에 집중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전후 미군 점령기 오키나와에서의 민중들의 생존이 매우 심각했음을 나타낸다

  현재 브라질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계 이민자의 총수는 약 180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10% 정도인 18만여 명이 오키나와계 이민자인 것을 고려하면,4 일본의 전국 행정단위 가운데 가장 많은 해외이민자, 그 가운데서도 브라질 이민자가 많은 현이 오키나와인 것이다.

  브라질로 이민한 오키나와인들은 다른 일본계 이민자와 마찬가지로 브라질 내 여러 곳의 커피와 목화, 사탕수수 농장 등에서 농업노동자로 일했다. 양봉(養蜂)과 박하 재배를 통해 상품을 미국으로 수출해 큰돈을 모은 사람들도 속속 나타났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일정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상파울루나 리오 데 자네이로 등 대도시로 이주해 중소사업가 혹은 자영업자가 된다. 하와이의 오키나와 초기 이민자집단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오키나와 이민자들은 가족 단위의 이민이 많았다. 최초에는 단신으로 브라질에 계약이민했다고 해도 이후에는 초청이민의 형태로 가족들과 재회하게 되었는데, 그런 과정 속에서 오키나와의 전통과 문화와 언어를 브라질 안에서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다른 아시아계나 남미, 아프리카계 이민자 집단과는 달리, 일본계 이민자들은 명예백인으로서의 지위를 누려 인종적 차별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그러나 일본계 안에서도 일본의 본토(本土) 이민자(‘야마톤추라 부른다)와 오키나와계 이민자(‘우치난추라 부른다) 사이에는 미묘한 민족적·문화적 갈등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오키나와인으로서는 450년간의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가진 류큐왕국의 전통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일본에 무력병합된 것이기 때문에, 일본 본토에서 있었던 조선인·오키나와인 차별 양상이 브라질의 이민자 사회에서도 완전히 불식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서서히 희석되었다.

  브라질의 오키나와 이민자 커뮤니티는 일본국민이면서도 오키나와인으로서의 전통을 지속시켜 나갔다. 오키나와 현인회(県人會) 등의 조직이 이민 초기인 1920년에 결성된 것은 그러한 공동체 의식의 강렬함을 보여준다. 오키나와 특유의 조상숭배 의식, 오키나와 전통악기인 산신’(일본 샤미센의 원형이다)에 맞춘 류큐민요의 애창과 전승, 오키나와 특유의 공동체 문화인 유이마루’(상호부조) 정신, ‘모아이’(계모임) 등을 통한 정기적인 교류 등, 오키나와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은 브라질에서의 고된 노동을 극복하게 하는 문화적 원천이 되었다. 특히 오키나와인들은 여성들의 영력(靈力)과 가족경영을 중시하였다

  오키나와의 전통적 신앙관념 속에서 여성들은 가족 및 공동체의 위험을 영적으로 예방하고 치유하는 샤먼으로 간주되었다. 과거 오키나와에서는 왕실이 국가 샤먼인 노로조직을 중앙집권적으로 운영하였고(국왕의 누나나 여동생이 노로조직의 수장이었다), 마을 공동체 안에는 민간 샤먼인 유타가 길흉화복을 주재했다. 이들 샤먼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물론 근대 이후 브라질 이민자 사회에 노로와 유타가 제도적으로 존재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여성들은 가족공동체 안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경영의 주체로 이민자 가족노동이 수반하는 고통과 위험, 심리적·신체적 무력감을 회복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오키나와의 가족공동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유교적 관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일본 본토의 가부장주의와는 조금 양상이 다른 가모장제에 근거한 생활의 안정과 저력을 보여주었다.

  끝으로 일본의 패전 후 브라질에서 있었던 일본계 이민자들의 비극적 에피소드 한 가지를 소개하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5 태평양 전쟁 당시 브라질은 연합국의 일원이었다. 따라서 1941년 일본이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한 이후, 브라질 정부는 일본계 이민자들의 일본어 사용을 금지시키고, 브라질 내 일본어 신문의 발행이나 라디오 방송도 금지시켰다. 그런 까닭에 공식적으로는 1945 9월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이 브라질 이민자 사회에 알려지지 않았다. 도리어 브라질의 일본계 국가주의 지식인들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일본의 함대가 적국인 브라질을 무력으로 접수하러 올 것이라는 유언비어조차 일본어 전단의 형태로 지속적으로 유포했다. 이런 신념의 소유자를 승리파혹은 신념파로 명명한다. 불행하게도 당시 브라질 일본계 이민자 사회의 90% 가량은 이러한 유언비어를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반면 현지의 포르투갈어 신문을 통해 일본의 패전 소식을 알게 된 10% 가량의 이민자 집단도 존재했다. 이들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반대로 일본은 전쟁에서 완전히 패하였고, 일본의 국토 역시 규슈·혼슈·시코쿠·홋카이도로 한정되었다는 점을 대중에게 사실대로 알렸다. 이들을 패배조혹은 인식파로 명명한다

  문제는 태평양전쟁이 끝나고도 한참이 경과한 195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브라질 내의 일본계 이민자들 대다수가 전쟁에서의 일본의 패배를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주장하는 현실 인식파를 국가에 대한 반역자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그것이 극단화되면서 우익청년이 중심이 된 특공대를 조직해 일본의 패전을 사실대로 설파했던 인식파의 지도급 인사를 암살하는 행위가 지속되었음은 본국으로부터의 정보가 차단된 브라질 이민자 사회의 비극이었다

  패전 이후 일본은 전전(戰前)의 군국주의를 극복하고 민주주의 사회로 급속하게 전환하고 있었다. 그러나 멀고 먼 이역의 일본계 이민자 사회는 상당한 시기 동안 일본의 패전을 결코 믿지 않았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만큼 브라질의 일본계 이민자 사회는 원격지(遠隔地) 내셔널리즘이 강렬했다고 볼 수 있다.

Footnotes
  • 1

    1888년에서 1941년까지 일본계 해외 이민자수는 1위인 히로시마현이 96,848명, 오키나와현이 72,227명으로 일본 내 2위였다. 花木宏直, 「第二次世界大戦における沖縄県からのブラジル移民青年隊の移住過程」, 『移民研究』第17号, 沖縄移民研究センター, 2021, p. 1.

  • 2

    김영철, 「브라질의 이민정책과 아시아계 이민특성 연구」, 『포루투갈 브라질 연구』, VOL.8 NO.1, 한국포르투갈브라질학회, 2011. 6, p. 84. 

  • 3

    石川友紀, 儀保ルシ-ラ悅子, 仲程昌德, 野入直美, 浜崎盛康, 山里純一 執筆 ; 町田宗博, 金城宏幸, 宮內久光 編, 『躍動する沖繩系移民 : ブラジル, ハワイを中心に』, 彩流社, 2013, p. 21.

  • 4

    石川友紀, 儀保ルシ-ラ悅子, 仲程昌德, 野入直美, 浜崎盛康, 山里純一 執筆 ; 町田宗博, 金城宏幸, 宮內久光 編, 위의 책,  p. 153.

  • 5

    이하의 사건의 서술은, 高木俊朗, 「ブラジル日本人移民: 実は「日本は勝ったの大狂態」, 『奇聞·太平洋戰爭』, 文春ムック, 2015의 내용을 요약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