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하인리히 뵐 재단의 지원으로 방콕에서 열린 Asia Democracy Assembly에 참석했다.
오랫동안 마음의 고향처럼 여겨온 태국에서, 그것도 아시아 각국의 민주주의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에서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생생하다. 짧지만 밀도 높은 4박 5일의 첫 해외 출장을 마치고, 그 시간들을 돌아보며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본다.
내 안의 흥선대원군을 마주하다
K-컬처 열풍이 세계 곳곳을 뒤흔드는 동안, 나는 어딘가 모르게 그 흐름을 일부러 외면해 왔다. 지나친 국가주의에 매몰되기 싫다는 이유로, 혹은 한국의 인기가 과장된 것 같다는 의심 때문에, 스스로 거리를 두어왔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런 태도 자체가 너무 ‘내 안의 흥선대원군’ 같았다. 섬처럼 고립된 사고방식, 스스로를 작게 만드는 태도—그 한계를 이번에야 비로소 실감했다.
네트워크 파티에서 DJ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틀어주던 순간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국제 활동가들의 공간에서 흘러나오는 풍경이 낯설면서도 벅찼다.
세계는 이미 서로의 역사와 문화를 빠르게 주고받고 있었고,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더 적극적으로 사람을 보내고, 자원을 나누고, 경험을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글로벌한 감각, 대체 뭘까
무엇보다 먼저 느낀 건 영어의 벽이었다. 영어 공부에 대한 부채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괜히 허세를 부리며 “이공계 천재들이 곧 번역기 만들어주겠지” 하고 미뤄왔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런 번역기가 나 같은 사람에게 맞춰서 만들어질 리 없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과거의 나를 원망하며 오늘도 영어회화 앱을 켜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런데 돌아보면, 영어 그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글로벌한 감각’ 혹은 태도가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컨퍼런스 첫 세션이 열리자마자 아주 선명하게 드러났다. 100명이 훌쩍 넘는 거대한 강당에서 발표가 끝나자마자 청중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들고, 마이크 앞으로 걸어나가 자유롭고 당당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한국에서는 거의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었다. 질문의 질도 높았지만, 그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주저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나도 이 공간의 일부다’라는 확신이었다.
행사 내내 분위기는 비슷했다. 참석자들은 세션 사이 복도에서 자연스럽게 스몰토크를 나누고, 네트워크 파티에서는 자신의 활동 경험이나 고민을 거리낌 없이 공유했다. 누구에게 말을 걸어도 어색함 없이 대화가 이어지는, 그런 문화가 당연한 듯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이런 세계에서 내향형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남는 걸까?
아니, 그보다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이었다. 나처럼 한국식 ‘조용한 관찰자 모드’가 익숙한 사람은 이 흐름 속에 어떻게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출장에서 돌아온 뒤에도 오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곱씹어보면, 정작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든 시간들—세션 사이의 짧은 대화, 가벼운 인사, 네트워크 파티에서의 몇 마디 소개—이야말로 공식 발표 시간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많은 배움을 주었다. 사실 한국에서는 이러한 ‘가벼운 연결’의 문화가 그리 자연스럽지 않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을 때 미소를 건네거나, 지나가며 한두 마디 스몰톡을 나누는 일은 흔하지 않다. 나 역시 그런 걸 거의 해보지 않은 사람이고, 오히려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먼저 피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게 해보려고 마음먹었다. 용기를 조금만 보태어 눈인사를 하고, 짧은 인사를 건너고, 상대의 역할이나 관심사를 물어보았다. 대단한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깊은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다. 그저 당연한 듯 자리 잡은 ‘친절한 스몰토크’에 발을 얹어본 정도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몇 마디가 공간의 공기를 바꾸었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부드러워지고, 상대도 웃어 주고, 그리고 그런 교류 속에서 내가 조금 더 열린 사람이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 이런 작은 습관이 모이면 세계가 조금 달라질 수 있겠구나—이번 출장에서 얻은 가장 실질적인 배움 중 하나였다.
세상은 넓고 민주주의 이슈는 많다.
작은 세계 바깥을 마주하다. 내 작고 귀여운 세계에서는 민주주의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지난 계엄 상황이 큰 충격이었던 것도 사실이고(충격이 아니었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적 후퇴를 목격할 때마다 깊은 위기의식을 느껴왔다. 그런데 이곳에 와보니, 그런 감정조차 자칫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개최지인 태국만 하더라도 정권이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몇 번씩 바뀌고, 멀쩡하던 정당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곤 한다. 멀리서 뉴스로만 접하던 로힝야 난민의 절망적인 현실,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참상 같은 이야기들을 당사자들의 목소리로 직접 들었을 때,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안다고 착각하며’ 지나쳐왔는지를 깨달았다.
내 세계는 너무나 작았고, 그래서 더 안전했다. 하지만 그 작은 세계에서 벗어난 지금, 한 가지는 분명했다.
우리에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우리가 진행한 세션에서 ‘페미니즘과 남성 참여’를 주제로 발표했을 때, 여러 나라의 활동가들이 공통적으로 강한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게 우리에게도 가능한 이야기인가?” 하는 낯섦과 고민도 함께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이런 논의를 한국에서만 하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국제적으로도 꺼내 놓아야 하지 않을까? 발표자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참여자의 경험과 질문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민주적인 세션 운영 방식, 한국에서의 실험과 시행착오를 공유하는 일, 그리고 같은 고민을 가진 활동가들과 네트워크를 만드는 일—어쩌면 그런 작은 시도가 우리가 글로벌 시민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그 모든 생각을 담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조용히 되뇌었다. 첫 해외 출장치고는 꽤 괜찮은 시작이었다.
무엇보다, 조금 더 열심히 살아보고 싶다는 에너지를 다시 얻었다.
내 작은 세계를 넘어서, 더 넓은 곳으로 가보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