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정치 지형 속 성소수자는 어디쯤 위치할까?
그 물음에 정면으로 답하려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등장했다.

보이지 않던 존재에서 함께 나아가는 존재로
프로젝트 RUN/OUT은 한국 사회 곳곳에 흩어져 있는 퀴어 정치 역량을 지도처럼 그려내고, 성소수자 정치 리더십을 길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투표장에 가는 ‘유권자’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 서는 ‘후보자’로 향하는 길을 열어 주는 셈이다.
지난 8월 30일 토요일 저녁, 프로젝트 RUN/OUT의 첫 공식 행사인 “이렇게 된 이상, 국회로 간다!” 가 40여 명의 참가자들로 가득 메워진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사정전에서 열렸다. 국회에서 직접 활동했던 정책 비서관, 수석 보좌관, 대변인 등 네 명의 정치 선배들이 마이크를 잡고 퀴어 정치의 현실을 숨김없이 들려주었다. 한국 정치판 속 성소수자의 실상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었던, 흔치 않은 자리였다. 그날 신명 나게 풀어낸 이야기들을 이렇게 다시 펼쳐본다.
한국 정치의 숨바꼭질
그렇다면 성소수자는 지금 한국 정치에서 어디쯤 서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어디에나 있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없다. 국회에는 성소수자 보좌관, 비서관, 대변인, 그리고 선출직까지 존재한다. 하지만 대다수는 정체성을 숨긴 채 일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향력은 행사하는, ‘있으면서도 없는’ 모순된 존재다.
공개적으로 퀴어임을 밝히고 정치를 한다는 건 매일같이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정당성을 방어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작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도 전에, “나는 여기 있어도 된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에너지를 써야 한다는 말이다.
인사 검증의 민낯
정치권에 발을 들여본 사람들은 잘 안다. 인사 검증이 얼마나 사적인 영역을 파고드는지.
성소수자 보직 후보자들은 동성 파트너 관계, 가족관계 등록, 건강보험 피부양자 문제 등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 질문하는 사람조차 어색해 할 정도다. 제도 자체가 퀴어의 현실을 전혀 상정하지 않은 채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다
2008년, 한국 최초로 커밍아웃을 선언하며 출마한 최현숙 후보의 도전은 여전히 기념비적이다. 하지만 그 이후 퀴어 정치인의 등장은 여전히 ‘가능한 상상’에 머물렀다.
RUN/OUT이 선택한 방식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보이게 만드는 것.
홍대, 이태원, 종로 등 서울 퀴어 거점에서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성소수자 정치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상영한다. 단순한 영화 상영회가 아니다. 정치적 각성과 커뮤니티 모임이 동시에 일어나는 현장이다. 게다가 매회 한국의 전·현직 퀴어 후보자를 직접 모셔 소중한 경험을 함께 공유한다. 정치가 더 이상 먼 나라 얘기가 아니라, 바로 옆자리에서 커피를 마시며 들을 수 있는 경험이 된다.
퀴어 정치, 새로운 플레이북을 쓰다
이런 활동을 통해 RUN/OUT과 친구사이와 같은 성소수자 단체들은 퀴어 정치 세력화를 위한 새로운 전략집을 써 내려가고 있다.
조직된 힘을 키워 선거 판세를 좌우할 수 있는 유권자 집단을 만들고, 정치 지망생들이 전략을 공유하며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국회 안에서 퀴어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가시화 작업도 이어진다. 한 번 드러난 존재는 지울 수도, 더 이상 무시할 수도 없는 것처럼…동시에, 앞서 걸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 다음 세대 후보들에게 길잡이가 되게 한다.
미래의 무지개 전사들에게
정치에 도전하려는 이들에게 오늘이 게스트 네 명은 이렇게 말한다. 너무 겁먹을 필요도 없지만, 결코 가볍게 볼 일도 아니다. 정치는 로켓 과학은 아니지만, 인간 심리를 다루는 고급 과정처럼 느껴질 때가 많고, 막중한 책임도 따른다. 그러나 부당함을 참지 못하는 마음 자체가 이미 정치적 본능이다. “누군가는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이미 절반은 준비된 셈이다.
첫걸음은 거창할 필요가 없다. 정치는 멀리 있지 않다. 동네 모임, 커뮤니티 공간, 지역 정당 사무실에서 시작된다. RUN/OUT은 정치 대화를 안전하고 익숙한 퀴어 공간으로 가져와, 참여가 ‘먼 꿈’이 아니라 ‘지금 가능한 일’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선구자들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을 때, ‘불가능’은 어느새 ‘내 차례 일지도 모른다’로 바뀐다.
무지개빛 장벽을 허물다
대표성의 길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RUN/OUT 같은 프로젝트가 보여주듯, 누군가는 반드시 그 벽을 두드려야 한다. 이제 물음은 “가능할까?”가 아니라 “누가 함께할까?”로 옮겨왔다. 민주주의는 모두가 함께 앉아야 완성된다. 무지개 깃발과 함께라면 더더욱.